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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이던 91년, 아버지가 당시 SK에서 수입했던 286컴퓨터, 스마트를 구입하시며 컴퓨터를 만지기 시작했다. 경기 북부에서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냈기 때문에, 컴퓨터를 빨리 접하는 것이 매우 드물었던 곳이었지만,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운 좋게도 컴퓨터를 구경할 수 있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지는 내가 컴퓨터와 친해지는 것 역시 마다하지 않으셨다.


MS-DOS부터 Windows 7까지. 각종 운영체제와 몇개의 컴퓨터를 갈아치우며 20여년이 흘렀다. 나는 컴퓨터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그렇게 싫어하지도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분해 해보고 조립해보고의 호기심과 열정의 개념이 아니라, 컴퓨터 앞에 상주해 있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컴퓨터가 가져다 준 가장 큰 변화이자 매력은, 오프라인으로만 만날 수 있는 사람과의 만남의 가능성을 미지의 영역으로 확대시킨것에 있다. 통신이라고 해 봐야 HAM, 아마추어 무선통신 밖에 더 있었을까. 컴퓨터가 한번 바뀌고, 모뎀을 달고 나서 처음 PC 통신을 접했다. 아버지는 그것을 바둑을 두는 동호회를 만나는 통로로 사용하셨고, 나는 당시 한창 열을 올리던 성우와 외국 드라마 정보 탐색에 이용했다. 하이텔에서 만나는 다양한 동호회와, 정보들, 그리고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미지의 사람과의 소통은 분명 매력적인 일이었다. 


아마 접속이라는 영화가 나왔던 것은 그 무렵이었을것이다. 내가 아직 중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즈음인가. 만남의 통로가 확대되며, PC통신으로 만나 로맨스를 만들고, 결혼까지 했다는 커플들의 소문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동창과 오래된 친구, 그런 친구의 소개를 통해 만나는 다른 친구로, 잠재적 연인 혹은 네트워크를 만날 저변이 확대 되며 정보를 알 수 없는, 온전히 상대방의 소개에 의존해야 하는, 이른바 익명의 상대방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뭐, 꼬맹이었던 그때 뭘 알았겠나. 내가 했던 활동은 엑스파일 동호회, 성우 이규화씨와 서혜정씨 동호회, 그리고 외국 드라마 동호회정도가 전부였고, 경기도 북부에 산다는 지역적 한계는 실제로 호기심이 있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주지 못했다. 당시 PC통신의 주체는 10대후반부터 2030이었으며, 시삽으로 활동하는 주축 멤버들은 나보다 이미 적게는 7-8살, 많게는 10살이 많았다. 


그렇게 천천히 커뮤니티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PC통신 비가 많이 나왔는데, 아버지에게는 혼나지 않고 어머니에게 아빠와 내가 함께 혼났다. 그러나 온라인 바둑을 두기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비싼 통신료를 내면서도 꾸준히 통신을 사용하셨다. 시간이 흘러 PC통신의 시대는 저물고, 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프리챌, 다음카페등으로 커뮤니티 인구가 이동했다가, 동창을 찾는 아이러브 스쿨, 다모임이 유행하고, 영어로 채팅을 할 수 있었던 세이클럽도 등장했다가, 야후와 라이코스, 알타비스타가 검색엔진으로 떠올랐고, 이내 그 회사들은 사라지고(이제 남은것은 야후가 유일하다) 다음과 네이버가 주도권을 쥐며 포털사이트 더하기 커뮤니티, 그리고 블로그를 이어간듯 보인다. 비교적 최근에 10대부터 2-30대 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싸이월드, 싸이월드가 저물고 극 초반에 등장한 페이스북과 트위터, 그리고 일인 블로그까지. 인터넷 커뮤니티는 근 10년간 한국 근현대사 보다 더한 격변을 겪었음에 틀림없다. 사실 나의 기억 회상 능력이 그렇게 정확한 것은 아니라 시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는지는 모르겠다. 가입하고, 활동했던 몇개의 사이트들을 찾아보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프리챌에 성우 팬클럽을 만들었던것은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어질 줄 몰랐다. PC통신에서 알고 지냈던 몇몇분이 프리챌로 이사오고, 나중에 통신이 저물며 대부분의 인터넷 커뮤니티를 프리챌이 평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동호회를 만든 사람 치고는 내가 가장 어린 축에 속했는데, 당시 엑스파일과 성우 이규화, 서혜정씨의 광팬이었던 나는 매주 KBS방송국에 팬레터를 보내고, X파일은 한국 방영분과 홍콩 위성채널인 Starworld에서 1주일에 3번 반복 방영하는것을 모두 챙겨보며 그야말로 잉여 덕후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엑스파일을 처음 접했던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그 전부터 영어 위성방송은 보고 있었고, 부모님은 내가 영어 방송보는것을 장려하시며 전혀 제지하지 않으셨기에, 나는 그야말로 외국 드라마가 하루종일 나오는 Starworld방송을 끼고 살다 시피 했다. 덕분인지 때문인지, 내가 두번째로 좋아하던 영어를 전공하고, 동시에 영어로 밥을 벌어먹고 살기까지 하지만, 엑스파일이 내게 준 영향은 꽤나 지대하다.


드라마 전반에 등장하던 회의론, 음모이론, 그리고 신비주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대신 두 캐릭터가 가진 상반된 매력에 흠뻑 취해버렸다. 엑스파일을 보기 시작하며 다른 시리즈도 주의깊게 보기 시작했고, 2년쯤 지나자 외국방송이 한국방송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영어를 좋아하게 되었나요?" 라고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TV가 최고의 선생님이었어요." 라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엑스파일의 팬들, 그리고 엑스파일 성우의 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이규화씨의 팬클럽을 만든것은 고1때 였으나, 이미 팬레터는 중학생 때 부터 보내고 있었기에, 커뮤니티 멤버들을 알고 지내기 시작한것은 2-3년이 이미 되어 있었다. 하이텔의 다른 팬클럽과 함께 교류를 하며 이른바 정모라는 것을 하기 시작하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온라인에서만 만나던 사람들을 현실세계에서 보기 시작한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 역시 나와 같은 사람이긴 한데, 우린 모두 어쩌면 같은 것을 좋아할 텐데,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 하나로 처음 만났어도 어색하지 않다는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일년에 서너번 만났나보다. 이규화씨 생일에는 생신을 함께 챙겨드리기도 하고. 그러면서 마지막까지 남은 몇명의 멤버는 아직까지 안부를 묻고 지낸다. 벌써 12년이 훌쩍 지난 일이다.


그 외의 커뮤니티에서 열정적인 활동을 한 기억은 없다. 내가 만들었던 성우 이규화씨의 팬클럽은 나의 대학 진학과, 바빠진 개인 일과에 치여, 내 스스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동시에 프리챌의 사용자수가 급감하고 다른 커뮤니티로의 대이동이 시작되었기에, 점점 희미해져버린다. 관심사 분류에 들었던 테니스, 미국드라마 시리즈, 영어, 그외 잡다한 정보 수집용 카페에 가입하긴 했으나, 테니스 빼고는 오프라인 모임을 가진 적이 없는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정말 시간을 쪼개 쓰고 살기도 힘들어 지면서 웹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은 과제할 때 말고는 없어져 버렸다. 


아. 하나 빠뜨릴 뻔 했구나. 대학 1,2학년 때, 학교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를 하면서 동시에 음악에 심취해 있던 때가 있었는데, 당시 도대체 그 체력이 어디서 나온건지, 집에 오자마자 밤 12시에서 새벽 2시정도까지, 인라이브에서 윈엠프로 재즈 방송을 하던 때가 있었다. 시그널도 선곡하고, 매일 방송할 곡을 선곡하고, 내 방송을 정기적으로 듣는 사람이 있던 그때. 아무도 잘 건드리지 않던 재즈라는 장르 때문인지 나는 웬지 모르게 열심히 비정기적으로 방송을 하곤 했고, 잠시 매일 인터넷에 접속하는 시간을 늘리기는 했다. 불면증이 심해진것은 그때 부터였다. 새벽 6시에 일어나 학교에 가서 아침방송을 하고, 좀 정리를 한뒤 여학생 휴게실에서 2-3시간 쪽잠을 자고, 학교 밖으로 나가 통역 아르바이트나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야간으로 미루어 수업을 듣고, 끝나면 10시. 통학거리가 왕복 5시간이나 되는 집에 도착하면 12시가 넘었다. 근데 오자마자 샤워만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방송을 하고, 2시간도 안되는 시간을 잠들었다가 다시 나가고. 아마 미쳤던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그 생활을 반복했는지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무려 연애도 했다. 그런 시간과 에너지는 어디서 나왔던건지, 지금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학교 가는 거리가 워낙 길었기에, 버스에서 한시간, 지하철에서 한시간, 왕복으로 매일 3시간을 대중교통 안에서 잠들어 있긴 했다. 그러나 분명 비정상적이고 소모적인 삶이었다. 내어맡겨졌든 혹은 선택했든. 


한동안은 싸이월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런 저런 사진을 올리고, 일기를 쓰고, 글을 올리고. 이벤트에 다발적으로 참여하고. 그 시기가 지나고, 한동안 직장일에 바빠 컴퓨터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 시기가 왔다. 퇴근해서는 아예 컴퓨터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오히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울펜슈타인 3D, Jack's library, Einstein, 프린세스 메이커, 슈팅게임등 등 당시 나름 인기 있었던 2D게임들을 곧잘 하곤 했다. 중학교 들어가면서 부터 게임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그 이후에 나는 어떤 게임기나 컴퓨터, 휴대폰을 만나든, 게임은 전혀 하지 않는다. 흥미를 잃은 특별한 계기는 없었는데, 다른 게임을 접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싸이월드도 시들해지고, 정말 컴퓨터에서 완전히 손을 놓게되는 시기가 등장했다. 커뮤니티는 뭐였고, 온라인은 뭐였는지, 컴퓨터를 하는 이유는 오로지 어쩌다가 웹서핑 하는것이 전부인 그런 시기가 왔다. 온라인 쇼핑을 하거나, 그냥 휘휘 이런 저런 사이트를 돌거나, 블로그, 혹은 해외사이트를 돌다 나오기만 했다. 


그리고 2년전 트위터를 만났다. 


말하는 직업이기에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 말하기를 매우 피곤하게 여겼으나, 천성은 수다쟁이인 내가 나름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주로 어릴 때의 에피소드를 주절주절 거리거나, 어떤 생각에 주제를 잡고 160자 안에서 자꾸 살을 붙여 나중에 이어붙이면 장문을 써나가는 단문 연습장으로 사용했다. 트위터에서 다시 물꼬를 튼 이른바"당" 성격의 커뮤니티에 몇개 가입하기도 했고, 내가 직접 마라톤 당을 만들기도 했다. 


마라톤 당은 만들어 놓고도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게, 트레이닝 런을 하려고 해도 다들 사는 지역이 다르니 시간 맞추기가 힘들었으며, 둘째로는 나 빼고 대다수가 남자분들이라 학교 선배님 한분 빼고는 깜짝 놀랐던것, 마지막으로 실제로 대회에 간다고 만난다 해도 마라톤 대회장은 통신불능상태 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휴대폰으로 전혀 연락이 닫지 않는 이유로 제약이 많았다. 


마라톤당은 부당주였던 분께 거의 부탁을 하다 시피 해서 넘기고, 나는 만든 사람에 대한 책임을 모두 회피하고, 더이상 당을 만들거나 하지는 않기로 다짐했다. 좋은 의도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때 뭔가를 운영하던 그 열정은 살아나지 않았다. 대신 해외에서 만들어진 블로그인데, 한국 사람의 사용자가 낮아 그 루트가 꽤나 폐쇄적이던 텀블러를 만나게 된다. 텀블러에서 비슷한 음악을 듣고, 공연을 가면 만나는 분들과 의외의 우연함으로 커뮤니티가 생긴 곳에 마지막으로 들어가고, 그 곳에서 온라인에서 보던 분들을 다시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경험을 한다.


10년만의 일이다.



사람들은 매우 다양하다. 성향도, 성격도, 좋아하는 취향도, 배려심이나 이기심의 정도도, 자기포장과 자기 표현의 정도도, 외향성과 내향성도 모두 다르다. 웬지 모르게 음악과 폐쇄적 블로그로 연결된 이 사람들과의 모임에 나는 안심을 했고, 다른 우후죽순의 모임 보다는 더 좋은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매우 개인적이었으며, 자주 만나지 않았고, 어쩌다 공연장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우연하게 대학 선배도 있었고,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서로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거리라는게 있었다. 각자 삶에 충실하고자 노력했을 수도 있고, 이미 지나친 관심이나 가까움은 독이된다는 것을 아는 나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페이스북은 더 복잡한 개념인데, 다른이들에게는 페이스북이 동창들과 교류하는 통로인 반면, 나는 그 모든것을 다 섞어놓은 교집합이다. 직장 동료들이 대부분 외국인이기에, 어떤 포스팅을 올리는데 있어서 큰 제약이나 눈치볼 것이 없기 때문에, 페이스북에 이어진 사람들의 반은 동창, 1/3은 온라인으로 알게 된 사람, 그리고 나머지는 직장 동료라는 독특한 구조가 되었다. 


트위터가 주절주절 수다를 떨며 글쓰기를 연습하는 장소라면, 페이스북은 그냥 다른사람들의 피드를 구독하고, 내가 어디에서 뭐하고 있으며 무엇을 먹고 있는지에 대한 사진을 올리거나, 가끔의 단상을 올리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인스타그램, 패스, 포스퀘어등, 아이폰을 접하며 가능해진 소셜 네트워크 유비쿼터스는 실로 대단했다. 매우 피상적인 보여주기식 인간관계라 폄하하는 평과, 그 자체로도 어떤 문화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을 나는 다 수용하기로 했다. 물론 SNS를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트위터는 프로텍트로 잠궈놓고, 그대로 의견 재생산의 도구로 사용하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했으며, 다양한 소셜네트워크 앱이 허브가 되어 서로 연동이 되고, 이어지고, 재생산되는 그 시기를 즐겨왔다. 


1년에서 2년정도 그렇게 지내온 것 같다. 그동안에 잘못 든 습관도, 아예 없애 버린 습관도, 그리고 실제 오프라인 지인들과 재정립한 개념도 많이 있다.


블로그에 포스팅을 올리는 것에 지쳐 1년간 쉰 기간동안, 나는 인스타그램과 트위터, 그리고 페이스북과 패스를 공동으로 활용하며 나의 일상을 전하기에 바빴다.


매일 무엇을 먹고, 무엇을 사고, 어디를 가고에 별 관심이 없는 인간들은 어쩌면 지독히 외로웠던 것일까, 아니면 보여주고 싶어하는 허세심리가 잘 작용한 것일까. 사소한 것에서 부터, 대단한 일 까지, 나는 미주알 고주알 SNS에 일상을 방송하고 있었다. 이는 매우 위험하기도, 동시에 즐겁기도 했다. 다른사람의 반응이 보인다는 것, 내가 만든 음식, 내가 정리한 공간, 내가 방문한 장소, 내가 방문한 레스토랑을 다른사람도 좋아해준다는 것은 한마디로 설명하기에 힘든 감정이다. 어쩌면 주목받고 싶어하는 성격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오프라인의 오랫동안 만나왔던 친구들과 나눌 수 있는 공감대의 한계를 서로 얼굴을 보지도 않는데 매일 보는 것 같다는 착각에 하트를 누르고 댓글을 달았던 것일까. 혹은 그 모든것일까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극소수의 몇몇 만나왔던 사람들과의 관계에 염증이 왔다. 좋으면 좋은거다 라고 생각하고 살아 왔으나, 감당하기 힘든 사람이 생기게 되었고, 연락이 스트레스가 되기 시작하며, 나는 아예 SNS를 모두 끊고 사용을 일시 정지하기에 이른다. 불편함을 주거나 눈에 거슬리거나, 서로 아예 교류가 없는 사람은 블락을 하거나 차단을 하고, 언프렌드를 한다. 

얼마나 편리한 인간관계인가. 맘에 안들면 그냥 버튼 하나면 끝인거다.

동시에 얼마나 잔혹한 인간관계인가. 역시 맘에 안들면 그냥 버튼 하나로 끝인거다. 나 역시 그렇게 잔혹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줬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기에. 



나 역시 수 많은 실수를 하고, 어리숙하고 미성숙하기도 하고, 감정의 기폭에서 왔다갔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나서는, 그냥 온라인으로 누군가를 믿으며 만나는 것을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좋은 인연도 많이 얻었으며, 놀라울 만큼 가까운 사람도 생기게 되었다. 2년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으니. 


오랫동안 각종 통신과 커뮤니티를 넘나는 결과 내린 결론을 그것이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멀쩡한 사람과 이상한 사람을 만날 확률은 같다.


다만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서 자신을 숨기거나 포장할 확률이 높아지며, 알아채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게 다르다. 


만남의 시작이 온라인이었든 오프라인이었든, 서로에게는 지켜야 할 거리가 존재한다. 이른바 배려의 거리. 너무 매몰차게 신경쓰지 않지도 않으며 동시에 너무 심하게 참견하지 말아야 할, 보이지 않는 거리. 온라인에서 만나서 분명 절친이 될 수도 있고,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가 될 수 도 있으며, 소울메이트를 만나고 결혼을 할 수도 있다. 그 모든것은 거리를 지켰다가 믿을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겪지는 않았어도 별별 일들이 일어난다는 온라인 세상의 변두리에서 지켜본 결과, 결국은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SNS를 이용하는 이들은 목정성으로 크게 나뉜다. 정보전달형, 정보 습득형, 자기 과시형, 리트윗형, 구독형, 발산형, 넋두리형, 친목도모형. 이를 어떻게 적당히 배분하고 퍼센트를 정해 사용할지 역시 자기 마음이다. 다만 누가 어떤 커뮤니티와 SNS를 사용하든 최소한 지켜야 할 예의의 거리를 지켰으면 한다. 제법 친하다고도 할 수 있는 어떤 분을 언팔하고, 보지 않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이는 그분이 주변 사람들을 대놓지 않고 하는 척 하면서 험담하는것에서 기인했다. 험담은 내 주변인으로 시작해 나에게까지 이어졌고,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내가 그사람에게 상처주는 것보다, 내가 그사람에게 상처 받는것을 끊어내는것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간다.


이해되는 사람과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 자신이 이해가 가능한 사람인지, 이해받기 위해 한동안 고민을 해야하는 사람인지도 제대로 정의내리지 못한 채 살아간다. 


어디까지 이해를 해야하며,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고, 어디까지 끊어내야하는지 역시 실제로 사람을 만나 부딪히는 것과 같이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당신은 어떻게 이 SNS 홍수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가. 아예 아무 것도 사용하지 않거나, 적당히 사용하거나, 주도적으로 사용하거나, 혹은 사용시간을 줄이고 아예 떠나버리거나.


분명한것은 다음 세대가 또 존재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20년 동안 커뮤니티와 온라인 만남, 그리고 모임이 변해왔듯, 다른 유형과 양상을 띈 소통의 도구는 생겨날 것이며, 우리는 또 그 어떤 장에서 익숙해 지기위해 노력했다가 떠나고, 혹은 돌아오기를 반복할 것이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공통분모를 공유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고, 누군가가 반응해주기를 원하는, 혹은 그 반대인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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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네인

좀처럼 높은 구두는 신지 않는데 몇달 전 친구와 자라에 갔다가 눈에 쏙 들어와버린 레드 플랫폼 힐. 집으로 그냥 돌아와 세번을 다시 생각하고 다른 매장가서 다시보고, 그래도 2주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앉아 결국 구매했었다.

가끔 나 자신에게 선물을 준다.

구매 패턴을 생각하면 일년에 한번 정도 인것 같다. 3년 전, 주 7일 근무하며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나 자신의 삶을 거의 버리고 일했던 전 직장에서 퇴사 할 때는 나중에 딸에게 물려줄 수 있을만한 클래식한 가방을 선물했고, (언젠가 딸이 안태어나면 어떡하지.)

직장을 옮긴 후에는 그동안 고생했던 것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에 가능하면 좋아하는 뮤지션의 공연을 가려고 노력했으며,

심난할 때마다 종로로 산책을 다니던 어느 날에는, 사진기를 친구로 삼고 싶은 마음에 일년을 고민하던 사진기를 샀고,

과로로 아파서 입원했다 퇴원한 다음에는 자전거와 비타민을 사주고,

언젠가 가장 아끼던 피아노가 팔리는 것을 보고 흐느껴 울던 소녀는 다 자라 숙녀가 되었고, 그렇게 사고 싶었던 신디사이져와 나를 위한 마이크도 샀다.

소비와 위로의 상관관계가 절대 등식은 아니지만, 위안을 줄 수 있으며 시간을 어루만질 수 있는 물건을 가지기 까지, 꼭 필요한지, 사야만 하는지, 계획에 어긋나는 소비는 아닌지, 지불가능성은 있는지를 고민하는 시간 사이 사이의 가슴 뜀, 그리고 마침내 품에 들어왔을 때 그 이후의 가슴뜀을 기억하는 과정은 선물을 하기에 충분히 가치있는 여정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사달라고 조르는 류의 사람이 아니다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은 적든. 부모님에게 조차 뭔가 사달라고 하는건 언제나 조심스러웠고, 대학 진학한 이후로는 부모님 도움을 한번도 받지 않았다.

꽤나 어두운 터널이 오랫동안 지속됐었다. 터널 밖으로 나오고 나서, 언젠가 부터 갖고 싶은 것들을 내 힘으로 사기 시작하고 나에게 선물할 수 있게 되며, 계획적인 소비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나에게 선물하는 시간 속에서 큰 위로를 받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타인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 가지는 의미도 크지만, 내가 나에게 필요하거나 갖고 싶은 것들을 고민해서 선물하고 오랫동안 쓸 수 있게 될 때, 문자 그대로 “자립” 했음에 크게 날숨을 쉰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뭔가를 사기보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바라고 사달라고 조르는 일부 사람들. 평행선과도 같은 가치관의 차이처럼 느껴진다. 이성에게 앙앙대며 물건을 받아내는 여자들 혹은 남자들의 심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나는. 좀더 마음을 열어놓고 보면, 그게 다른 관점에서의 능력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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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네인


스포일러가 소량 함유되어 있으니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은 뒤로가기 버튼을 눌러주시길 바랍니다. 






1.     가족.

혹자는 죽음을 앞둔 남자의 삶이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감히 가족영화라 부르겠다. 온 가족이 유쾌하게 볼 수 없음은 유감이나, 그 유감을 나눌 수 있게 될 나이가 되면 언젠가 태어나 장성할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이다.

 

 

2.     그리고 아버지.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눈물을 쉽게 보이면 안되고, 아파서도 안되며, 이성을 잃어서도 안 된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감정통제를 당하는 존재가 바로 아버지이다. 단지 아버지라 불리기에 그런 모습을 덧 씌워야 하는 것은 가혹하다. 그리고 내면의 상처와 소용돌이를 털어놓을 존재가 없는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무거운 짐을 온몸에 끌어안고 살아간다. 중력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 세상에, 자신의 몸 하나 부지하기도 힘든 세상에, 가족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부인의 아픔도, 자녀들의 성장도, 모두 그의 몫이다. 오롯이 짊어진 그 짐의 무게 앞에서 많은 아버지들은 멍들고, 병든다.

 

 

3.      

하얀 눈밭에서 만나는 욱스발과 생전 한번도 본적이 없다는 욱스발의 아버지. 40대를 언저리에 둔 주인공 보다 아버지는 훨씬 젊고 매력적이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대사의 연속. “올빼미는 죽으면 모구를 모두 토하고 죽는다.” 그 대사는 욱스발의 아들이 책을 읽으며 재현된다. 이는 세 부자의 삶과 죽음을 잇는 일종의 매개체. 

 

욱스발이 가진 죽은 영혼과 대화하고 영혼을 이승 밖의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능력은, 그가 현실에서 짓는 죄를 상쇄시키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종의 인력소개소의 브로커로 일하는 그. 중국인 불법체류자와 세네갈 불법체류자. 그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하고 받는 돈으로 다시 그들을 도와주고자 하는 연민을 갖는 것은 모순이다. 마치 묏자리를 써주고 죽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는 왜 고통 받는 이들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못했을까? 이는 어쩌면 자신이 받지 못한 부정에서 기인할 지도 모른다. 존재하지 않은 채 이야기로밖에 들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그에게 신기루 같은 존재. 언젠가는 이승에 있었지만, 더 이상 호흡을 잇고 있지 않은, 무덤 속에 들어가있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부재는 주인공에게 상징적이다.

 

힘드냐? 좀 살만하고? 어깨를 툭툭 치며 담배 한대를 물고 술잔을 기울이며 잘 살아내라고 무뚝뚝한 한마디를 하는 아버지의 존재. 이는 미시적 관점에서는 가정에서 자녀들을 보호하는 아버지의 울타리가 가진 막연한 이유이다. 언제나 그 곳에 있어줄 것 같은.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 고되어도 고되지 않은 척,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 아버지들은 그렇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불법체류자들은 거시적인 울타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국가가 없다. 국가는 자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회적인 방어막이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위해, 혹은 기회를 위해 스페인에 불법으로 체류하는 자들. 자의로 모국을 탈출했다는 책임은 추방으로, 혹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4.      

영화에서 아들인 마테오는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단순히 엄마가 조울증을 앓고 있기에 문제가 생겼다고만 보기는 힘들다. 아들을 때리고 후회하고, 아들을 방안에 혼자 두고 딸만 데리고 여행가는, 지극히 정서가 불안한 이 여자. 사실 마람브라는 영화 전체를 그리고 가정을, 사회를 압축한 캐릭터 같다. 혼돈 속에 살고 있고, 정돈되지 않은 채로, 기분에 취해 자신의 병을 가지고 행위에 대한 보상을 받기 원하는 나약한 영혼.

 

 

5.      

그나마 욱스발은 베아가 있었다. 영매 선배누나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정신적 지주. 자신이 귀신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 충격을 어떻게 딛고 일어서 귀천을 떠도는 영혼을 달래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 다독거려준, 욱스발에게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

자신보다 훨씬 작은 그녀의 어깨에 안겨서 한없이 울 수 있었기에 지금까지라도 버틸 수 있었는지도.

 

6.      

이 영화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삶과 죽음 보다, 도덕이 더 큰 것처럼 보인다. 타락과 탐욕으로 얼룩진 현시대에서, 도덕성을 져버리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의도하지 않았어도, 자신의 가족을 위해 다른 가족을 희생시켜야 하며, 동시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도덕의 해이와 책임감의 모순에 더 큰 무게가 실려있는 듯 하다.

 

7.      

이들은 모두 이방인이며, 속하지 않은 자, 그리고 가족에게 소외된 자들이다.

생에서 이방인인 사람은, 사에서는 이방인이지 않을 수 있을까.

 

8.      

영화의 시퀀스를 조각 모음 하여 줄거리를 정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줄거리의 나열은 영화 이름만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본다고 해서 단지 슬픔만 마주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감독의 전작들을 통해, 그가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지 어렴풋하게 궤적을 그리고 갔기 때문이다.

막상 불편한 진실들이 산재해 있는 화면에 눈을 맞추는 동안, 나는 그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잠재된 메시지나 장치에 신경을 쓰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순간들에 욱스발이 짊어진 모순된 고통을 응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감독에게 화나는 점이 하나 있다면, 한 영화에 너무나 많은 메시지를 넣어 버렸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생각이 부유하는 것들을 멈추지 못해 고통스러운데 더욱 상념이 많은 밤이 되어버렸다.

끝나고 나면 말 그대로 오만 가지 생각이 들면서 크레딧을 등지고 그냥 일어날 수 없게 된다. 원래 모든 크레딧이 다 지나갈 때 까지 않아있기는 하지만.

 

 

9.      

상징적으로 떠오르는 영상과 단어들, , 죽음, 광기, 애정결핍, 사랑, 도덕, 방만, 불법, 준법, 가족, 해이, 해체, 결속, 그리고 다시 처음.

 

 

10.    

결국 나의 후기는 결론을 찾지 못하고 산으로 갔지만,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영화를 마주하면 마음도, 신경도, 정신도 심히 불편해진다.

불편함을 알면서도 그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고, 눈을 돌리지 않고, 눈물을 흘리고 마주하며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는 것에 감사한 밤이고, 그래서 고마운 감독이자 배우이다.

그리고 내 눈물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혼을 팔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일 사고로 죽어도, 내 죽음을 슬퍼해줄 사람이 한 사람 정도는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혹 죽게 된다면, 그 감당할 수 없는 사실을 알리고 가슴을 파묻고 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그게 다이다.

 

하나 더. 아버지에게 내일 사랑한다고 전화해야겠다.

생각보다, 남겨진 시간은 길지 않다. 계실 때 더 잘 해야지. 순간적으로 가장 큰 효도는 결혼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머니께서는 결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시지만, 아버지는 아주 가끔 말을 꺼내신다. 그것도 직접 말씀하지 못하시고 엄마를 통해 전하신다. 손주가 보고 싶으시다며. 나는 그럴 때 마다 동생에게 먼저 얻으시라고 나는 아직 좀 멀었다고 했다.

딸이 자상한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 보다 더 행복한 일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게 한 것만 해도 감독은 가정 평화에 엄청난 기여를 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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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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